14년, 10만 8천 리, 81가지 역경의 모험
신화학자의 시선으로 보는
『서유기』의 진면모
풍자와 해학, 낭만과 재치로 가득한 모험 이야기의 원형!
『서유기』를 통해 동아시아 사상과 문화의 정수를 들여다보다
신화 연구자 이경덕의 『서유기』 해설서 『서유기, 모험의 시작: 자유와 인간의 도리를 찾아서』가 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정본 완역 『서유기』(대산세계문학총서, 전10권, 2003), 청소년을 위한 축역본 『서유기』(문지푸른문학, 전3권, 2010)에 이어 출간하는 이 책은, 청소년과 일반 독자 모두를 아우르며 『서유기』로의 모험을 시작하는 누구나 행로를 미리 살펴볼 수 있는 지도 역할을 맡는다. 『서유기』를 안팎으로 살펴보는 이 책은 안으로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간결하면서도 생생하게 소개하며, 밖으로는 7세기 당나라 승려 현장의 모험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가공을 거쳐 지금과 같이 소설 『서유기』의 형태로 만들어지기까지의 변천사를 짚어보는 동시에 이 이야기 속에 담긴 동아시아 사상과 문화까지 들여다본다.
14년, 10만 8천 리 서행 길을 거치며 81가지 역경을 헤쳐 나가는 『서유기』는 현장이 인도 지역을 여행한 역사적 사실에 환상적인 허구를 가미해,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불경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린다. “마치 된 것 같아 손오공” “늘어나라 하늘로 여의봉”과 같은 가사를 노래하는 인기 아이돌의 곡이 나올 만큼 『서유기』는 한국에서 일종의 문화 상식에 속한다. 〈날아라 슈퍼보드〉를 비롯해 수많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모티프가 되면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우리에게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친숙한 이름들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나오는 『서유기』 원전을 충실히 읽고 이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는 시도는 이야기의 위상에 비해 턱없이 드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산꼭대기에서 사방을 살피듯 『서유기』를 널리 조감한다. 무엇보다 방대한 분량의 줄거리를 각 요마와의 에피소드 단위로 나눠 요약함으로써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들려주고, 『서유기』에 대한 흥미를 돋운다. 한편 신화학자의 시선에서 『서유기』를 살피며 그 안을 채우는 상상 세계를 둘러보는 것 또한 이 책의 특징이다. 용왕이 다스리는 물속 용궁, 죽은 사람들의 세계인 저승, 신선들이 사는 하늘을 무대 삼아 인간과 원숭이, 돼지, 용 들이 활약상을 펼치는, 현실에 있을 리 없는 이 기이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바탕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거대한 동아시아 사상과 문화가 자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와 도교, 유교라는 동아시아 세 종교는 물론, 중국으로 전해진 인도의 대서사시나 동아시아 농경문화까지 살피다 보면 우리는 『서유기』가 당대 동아시아의 현실을 토대로 쌓아 올린 환상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좇아, 자유에 이르는 모험
이 책에서 저자는 『서유기』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짝지어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자유와 구속은 이 책이 주목하는 『서유기』의 핵심 주제다.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자유와 구속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며 모험을 이어나간다. 손오공 일행을 가로막는 요마들 역시, 다수가 ‘죽지도 않고 하늘에서 영원히 시종으로 사느니 자유를 찾아 지상에서 살겠다’라며 도망쳐 내려온 이들이었다.
화과산 꼭대기의 신기한 바윗돌에서 태어난 돌 원숭이 손오공은 72가지 술법에 통달한 뒤 세계 곳곳을 들쑤시면서 소란을 피운다. 가령 용궁에 가서는 ‘마음대로 길이를 늘였다 줄일 수 있는 몽둥이’ 여의봉을 손에 넣는가 하면, 저승을 뒤집어놓고는 모두의 타고난 수명이 적힌 생사부에서 자신은 물론 의형제들의 이름을 지워 불사의 몸이 된다. 이렇듯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활개 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손오공이지만,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 결국 석가여래에게 굴복하고 모험에 합류하게 된다. 더구나 금테 긴고아를 머리에 쓰게 되면서 제멋대로 행동할 때마다 삼장법사에게 제압당한다(때로는 삼장법사의 오해 탓에 손오공이 긴고아로 고통받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저자 이경덕은 여의봉이 자유를, 긴고아가 구속을 상징하며, 특히 긴고아는 인간의 문화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인간의 도리’를 배워나간다. 그렇다면 모험 끝에 ‘깨달은 자’가 된 손오공이 긴고아를 벗는 장면은, 외부의 제약 없이도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는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석될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처럼 신화학자의 시선에서 『서유기』를 깊이 있게 검토함으로써 다채로운 독법을 제시하는 것 또한 이 책의 매력이다.
『삼국지』보다 먼저 읽어야 할 동양의 고전
『서유기』는 『삼국지』 『수호전』 『금병매』와 더불어 중국의 ‘4대 기서’로 꼽히는 고전이다. 각기 흥미로운 성격을 지닌 이 4대 기서 중에서, 저자는 『삼국지』보다 먼저 읽어야 할 고전으로 『서유기』를 꼽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난세에 각지에서 일어난 영웅이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세우고 온갖 병법으로 속고 속이며 각축전을 벌이는 것이 『삼국지』의 주제라면, 개인이 자아를 실현하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룬 소설이 바로 『서유기』이기 때문이다. 『서유기』를 통해 삶의 지침을 세우고 나서, 세상으로 나아가 타인들을 마주하기를 권하는 저자의 제언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의 「에필로그」는 모든 대중이 한자리에 모여 합장하고 염불을 외는 『서유기』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여기서 ‘모든 대중’이라는 말이 가리키듯 『서유기』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우리이며, 이는 곧 『서유기』라는 모험의 끝에서 우리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차례임을 암시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즐거운 모험을 떠나기에, 이 책은 좋은 시작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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