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법적 권리가 있는가
나무와 돌고래, 숲과 강은 어떻게 법적·정치적 주체가 되는가
동식물과 자연이 참여하는 새 정치체제와 거버넌스는 가능한가
지난 11월 13일, 제주특별자치도는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 남방큰돌고래Tursiops aduncus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는 무엇보다 개체 수 120여 마리 수준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제주 남방큰돌고래를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제주 남방큰돌고래가 국내 생태법인 제1호가 된다면, 남방큰돌고래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소송에 나서 법적 다툼을 벌일 수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의 권리는 어떤 법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어, 어떤 절차로 행사될 수 있을까?
문학과지성사와 재단법인 ‘지구와사람’이 이번에 함께 선보이는 <지구와사람> 총서의 첫 책 『지구법학─자연의 권리선언과 정치 참여』는 이처럼 우리 사회에 새로이 떠오른 질문들을 마주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대안적 시스템으로서 ‘지구법학’을 소개한다. 지구법학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생태계와 자연까지 법적 주체로 삼는 법사상 혹은 법체계의 학문이다. 즉 인간이나 기업, 선박 등에만 주어지던 법인격이 자연에도 주어진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철학적 논의를 펼쳐 보이는 한편, 석호나 국립공원처럼 구체적 대상을 생태법인으로 지정하는 등 실정법 차원의 실천 행위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지구 곳곳에서 감지되는 기후위기와 ‘여섯번째 대멸종’의 원인이 무분별한 인간 활동에 있다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망이 더욱더 촘촘해지고 있다는 신유물론적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렇게 인류세에 접어들어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비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은 인문학과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나타나고 있다. 『지구법학』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구법학을 헌법학과 법철학, 정치학, 사회학, 정치생태학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에서 논한 10편의 글을 사회학자 김왕배(연세대) 교수가 엮은 모음집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에게 낯선 지구법학의 사상적 내용을 개괄하고 지구법학적 관점을 요청하는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을 살펴본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비인간 생명이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체제인 바이오크라시biocracy, 사유재산권 제도의 대안으로서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동등하게 돌보는 공동의 것인 코먼스commons 등, 사회를 생태적으로 재구성하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담아낸다.
인간 너머 존재들을 위한 법학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지구법학의 이론과 전개」는 지구법학의 기본 개념을 살핀다. 먼저 박태현(강원대 법전원 교수, 환경법학)은 지금 우리가 지구법학을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으로서 ‘인류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적한 뒤, 지구법학의 주요 내용과 그 법적 의미를 살펴본다. 오동석(아주대 법전원 교수, 헌법학)은 한국 헌법의 여러 개별 조문을 근거 삼아 생태적 헌법 해석론을 펼치는 한편, 헌법재판소나 법원 등 “개별 사안을 해결하는 동시에 법의 원칙을 선언”하는 역할을 맡는 사법부에 생태적 관점을 요청한다. 정준영(서울대 법학과 박사 과정, 법철학)은 비인간 자연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데 있어 기존 법철학의 권리 이론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주체/객체 이분법 위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비인간에 대한 사유재산권 제도를 지구법학의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대안적 관점을 모색한다.
2부 「인간 너머의 정치, 바이오크라시를 향하여」는 생명주의 정치체제로서 ‘바이오크라시’를 소개한다. 김왕배는 비교적 최근에 사회 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등의 이론을 개괄하면서, ‘비인간’이 행위주체로 자리매김한 사회와 정치는 어떠한 식으로 변모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이후 안병진(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정치학)은 ‘민주주의는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국가 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부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한 대의민주주의 모델의 메커니즘이, 상호 견제 기능이 약화되는 오작동을 일으키며 현재의 생태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한다. 아울러 그는 삼권분립에 ‘심의적 미래부’를 추가해, 비인간 주체와의 공존을 과제로 안은 미래 세대의 정치 참여를 제안한다.
3부 「한국 사회의 사례들─실험과 도전」은 인간과 비인간이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 얽혀 있는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포착해낸다. 김준수(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 수료, 정치생태학)는 2020년 생태계 교란 생물로 지정된 붉은가재Procambarus clarkii의 사례를 제시한다. 붉은가재의 교란 생물 지정은 국민국가가 자신의 영토 안에서 토착종을 보호하고 외래종은 퇴치·제거하는 생명 안보biosecurity의 한 장면으로, 이를 통해 필자는 인간 중심적 생명 안보 지식의 생산과 정책 수행 과정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최정호(서울대 빅데이터 혁신융합대학 사업단 연구교수, 헌법학)는 2021년 10월 한국 행정부가 제출한 ‘민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동물의 법적 지위 문제를 살펴본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여러 법률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아울러 고찰한 뒤, 유사 입법례로서 독일과 스위스의 논의를 통해 시사점을 도출한다. 박태현은 최근 한국에서도 논의가 본격화하는 남방큰돌고래의 법인격 부여에 대해, 특정 생물 종이나 생태계, 넓게는 자연 전체를 권리주체로 인정하는 해외 입법례를 소개한다. 그 후 현행 법체계 내에서 제주 남방큰돌고래를 생태법인으로 창설하는 방안들을 검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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